개화기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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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일본국왕으로 칭함)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통신사란 용어는 적례(敵禮)주1적인 입장의 대등(對等)한 국가간에 신의(信義)를 통(通)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단오는 우리 조상들이 지내던 명절 중 하나로 ‘수릿날’이라고도 불렀어요. 해마다 음력 5월 5일이 되면 여자들은 창포로 머리를 감고, 그네뛰기를 했어요.


무신이 천대받고 무과는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던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무과가 시행되었다. 무과는 문과에 비해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들고 부담이 덜했기에 몰락 양반이나 상민들도 인생역전을 꿈꾸고 응시하는 일이 많았다. 과거제도는 능력을 통해 인재를 선발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처음 시행된 고려시대에는 여러 문제점과 폐단이 따라 다닐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와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왕들의 모습 그리고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 등이 기록된 야사(野史)가 그 반쪽을 어느정도 매워주고 있습니다. 16세기에는 사림의 새로운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사서(史書)들이 개인적으로 편찬되어 주로 향촌 자제들을 위한 교재로 이용되었다.


추가로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 이양원과 합세하여 한강방어선을 막고 있었으나 4만 일본군을 막을 수 없어 모두 흩어지고 이시원 등과 함께 해유령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선발대인 70여명의 일본군을 죽인다. 그러나 이미 조정과 이양원,김명원과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한양의 정 북쪽인 양주로 후퇴했다.그러나 임진강 방어선이 뚫리자 비변사는 신각을 적전도주자로 간주하고 참형을 선고한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신각이 적전도주자로 간주되어 사형을 내리러 망나니가 내려감과 동시에 신각의 승리가 보고 되어 조정에서 다시 사람을 보내 망나니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려 했다.


사계절 내내 자연에서 보내는 흥취를 읊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는 연시조의 첫 작품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또한 신하의 의리를 담아 낸 성삼문의 ‘이 몸이 죽어 가서~’, 인륜과 도덕을 노래한 주세붕의 ‘오륜가(五倫歌)’, 학문에 정진할 것을 권유하는 이황의 ‘도산십이곡’ 등이 있다. 한편으로 황진이를 비롯한 기녀들은 사대부와는 달리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시조에 담아냄으로써 시조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1591년 이순신은 47세에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와 같은 선조의 결정을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잡과에는 중국어, 몽골어, 일본어, 만주어 등에 능통한 역관을 뽑는 역과, 의원들을 뽑는 의과, 법학 종사자들을 뽑는 율과, 천문, 지리, 주술 등의 분야를 뽑는 음양과가 존재하였다. 문신을 뽑는 문과, 무신을 뽑는 무과, 그리고 기술자들을 뽑는 잡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고려의 과거제도는 제대로 된 기틀을 갖추고 당시 기준으로 혁신적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제도적인 한계 탓에 비리와 폐단을 낳고 말았다. 과거제도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985년(광종 5)이었다. 과감한 개혁 정책을 실시하던 광종은 중국 후주에서 귀화해 온 쌍기를 통해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수강궁을 세운 왕은 세종으로,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된 아버지 태종을 모시기 위해 창덕궁의 동쪽에 수강궁을 지었어요. 대마도 번주는 안용복 일행 편에 다케시마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다. 조정은 대마도로 보낸 답변에서 독도와 죽도를 서로 다른 섬으로 표현했다. 대마도 번주는 독도릉도’라는 말을 싫어해서 그 표현을 지울 것을 조선 측에 주장했다. 영의정 남구만은 화답문을 고쳐서 울릉도와 죽도(다케시마)가 서로 같은 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일본인들이 조선 영토에 들어와 안용복 일행을 데려간 것은 실책”이라고 했다.


내시(환관)은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중국과 베트남 인도 등 동양문화권 나라들과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 서양에도 존재했습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태조는 3년 뒤에 수도를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기기 위해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을 지었다. 제일 처음 지어진 경복궁(景福宮)은 백악산(지금의 북악산) 아래로 넓은 지형에 건물을 배치한 법궁(法宮)으로, 태조는 이곳에서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야심을 품고 있던 또다른 왕자 회안대군 방간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웠으나 큰 보상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박포와 공모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잡은 이방원의 군사와 개경에서 맞붙어 패했으므로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보빙사를 따라 조선에 온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1884년 1월 조선 관리의 초대를 받고 조선의 최신 유행인 석식 후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 황제가 이 커피와 와플 등 서양식 디저트를 최초로 먹었다고 알려진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고종이 커피를 먹었다고 알려진 시기는 1895년 아관파천 당시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를 찾기 어려우며 기록에 따르면 고종 황제 전에 커피를 즐긴 조선시대 인물은 여럿 있다.


그러나 일본군 함대는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음날 9일(음력 4월 30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명백히 이순신은 싸워 이긴 것이며 모든 잘못이 이일 혼자에게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일이 신립과 친분이 깊다는 점 때문에 신립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일에게 처벌하지 않고 이순신에게 처벌했다. 조선군 11명 전사와 160명이 포로로 잡힌 것은 이일이 그렇게 한 것이며 이순신과 이경록은 이를 뒷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을 뿐이다. 실제로도 이순신은 이일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했지만 이일이 이를 거절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현재도 녹둔도의 일은 용인 이씨 가문에서 계속 왜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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